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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에 대한 복잡성 이론적 접근(amorfati, 20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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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079회 작성일 14-05-2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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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에 대한 복잡성 이론적 접근 복잡성 이론이란 무엇인가? (What is Complexity Theory?) 뉴턴에게 있어서 우주란 합리적이며, 결정론적이고 그리고 시계와 같은 질서를 가진 것이었다; 결과들은 원인들의 함수들이었고, 작은 원인들(최소한의 초기 조건들)은 작은 결과들(최소한이며 동시에 예측 가능한)을, 큰 원인들은 큰 결과들을 산출해내는 것이었다. 예측 가능성, 인과성, 유형성, 통제성, 보편성, 선형성, 연속성, 안정성, 객관성, 이들 모두는 비록 복합적이지만 일정한 균형상태, 비교적 정돈된 과학적 발견과 법칙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합리적, 폐쇄적, 그리고 결정론적인 체계 안에서 질서정연한 기제로서의 우주관 형성에 그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우주관은 점차적으로 복잡성 이론에 의해 도전을 받아 왔으며, 그 이론은 세계에 대한 관점과 연구 방식에 있어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변화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리고 안정성과 확실성은 드물게 존재한다. 복잡성 이론은 생존을 위한 변화, 진화, 적응과 발달이론이다. 복잡성 이론은 단순한 연속주의적 원인-그리고-결과 모델들, 선형적인 예측 가능성, 그리고 현상 이해에 대한 환원주의 접근방식과 결별하고, 유기적, 비선형적 그리고 전일적 접근방식으로 각각 이들을 대체하며, 그 이론 안에서는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들 내부의 관계들이 핵심이다. Prigogine과 Stengers 등은 발달 정도가 낮은 점균류의 자기-조직 안에서 복잡성의 중심 기조에 대한 매우 매력적인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Acrasiales 아메바. 만약 점균류의 환경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 영양소들 안에서 고갈이 되면, 그 아메바들은 화학적 감각기관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발견해내고 그리고 생식을 중단한다. 아메바들은 결집하게 되고 모아진 세포들과 포자들의 약 3분의 1 정도를 함유하는 일종의 ‘발판’을 형성한다. 이들 아메바들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적합한 새로운 환경을 찾아 이동하게 되고, 아메바들의 새로운 거주지를 형성하게 된다. 과연 여기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 유기체는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재조합하고 형태 변환함으로써 그 환경에 반응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환경에 반응하는 열려진 체계인 것이다. 그 과정은 자기-조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점균류는, 새로 기운을 찾고,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전체 과정이 역동적이다. 그 점균류는 자기-조직의 중심적인 형태인 자체촉매작용을 입증해주고 있다. 내부에서부터 유래하는, 스스로 진화하는 체계의 능력. 이 과정에서는 국지적인 상황들이 자기-조직의 창발성의 본질을 결정한다. 그것은 ‘상향식’ 과정이다. 이것은 복잡성 이론의 중심축에 대한 매우 간단한 사례이다. 자기-조직. 그것은 몇 가지 특징들을 내포한다. 적응성, 열린 체계들, 학습, 되먹임, 소통과 창발성 등이다. 균형 상태에서의 폐쇄적 체계들은 생명력을 잃고 죽고 만다. 체계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불균형상태를 필요로 한다. 안정된 체계들은 작동불능이 필연적이다. 변화, 불균형 그리고 예측불가능성 등은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들이다. 오로지 직선 방향으로만 날아가는 나비는 곧 잡아먹히게 된다. 유충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비가 되어야 한다. 자기-조직하는 체계는 자체촉매 작용을 하며 동시에 자기창조를 입증해준다. 각각의 살아 있는 체계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들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은 체계로 하여금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스스로의 지속과 재생을 가능하게 한다. 그 체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조건들을 창조해낸다. 자체-생산으로서 자기창조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 다른 것들과의 연동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 체계는 자체-재생적(비록 체계의 여러 측면들이 변한다할지라도, 예를 들어, 학교에서의 교사들의 교체처럼,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리고 자체-지속적이다. 학교들은 국지적인 맥락과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창조해낼 필요가 있다. 되먹임, 반복, 섭동, 자체 촉매작용, 연결 그리고 자기-조직 등을 통해서, 보다 더 고차원적인 수준의 복잡성과 새롭게 차이화된 형태들의 생명, 행태 그리고 체계들 등이 보다 더 낮은 수준의 복잡성과 현재 형태들로부터 발생한다. 이러한 복잡성 형태들은 종종 비교적 간단한 일련의 규칙들로부터 도출이 된다. 창발적인 복잡성의 전체적인 질서와 다양성을 생성하는 국지적인 규칙들과 행태들. 창발적인 질서의 일반적인 법칙들은 역동적인 적응의 과정을 관장할 수 있다. 개체들의 상호작용은 보다 더 넓은 환경 안으로 되먹임하며, 차례대로, 그 환경은 네트워크의 개별적인 단위들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공-진화하며, 나아가 서로를 형성한다. 이러한 공진화는 연결, 협동 그리고 경쟁을 요구한다. 발달을 강제하기 위한 경쟁, 그리고 상호 생존을 위한 접속. 전체로서 복잡성 체계의 행태는, 자신의 몇 가지 요소들로부터 형성되어, 부분들의 단순 총합보다 더 크다. 되먹임은 반드시 체계의 상호작용하는 요소들 사이에서 발생해야 한다. 음의 되먹임은 규제하는 것이다. 양의 되먹임은 효용체가를 실현시키며 그리고 변화, 성장 그리고 발달을 위해서 정보를 활용한다. 그것은 작은 변화를 증폭시키다. 일단 아이가 글자를 읽기 시작하면 그 아이는 글자 읽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 아이는 더 많은 것을 읽게 되며 그리고 기하급수적으로 학습이 이루어진다. 접속은, 복잡성 이론의 핵심적인 특징이며, 모든 곳에 존재한다. 숲속에서 개미들은 나뭇잎들을 갉아먹고, 새들은 개미들을 잡아먹고 그리고 배설물들을 남겨두고, 이것들이 개미들을 위한 나무와 잎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토지를 비옥하게 한다. 조직들이 갈망하는 많은 특징들을 자연은 소유하고 있다: 유연성, 다양성, 적응성, 복잡성, 그리고 접속. 학교에서는, 아이들은 가족들, 교사들, 친구들, 사회들 그리고 집단들 등에 연결되어 있다. 교사들은 다른 교사들에 연결되어 있으며, 여러 단체들(예를 들어, 심리적 그리고 사회적 봉사들), 정책-결정 단위들, 사회적 기금단체들, 국회, 그리고 그 외 등을 지원한다. 아동(참으로 학교)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들에서 외적 그리고 내적인 접속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요소를 혼란시키면 종이나 혹은 체계 전체가 반드시 적응해야 하거나 혹은 아마도 죽어야 한다. 그 메시지는 가차 없이 잔인하다. 접속은 분산된 지식 체계를 요구하며, 그 안에서 지식은 명령과 통제의 중심 안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체계 전체에 걸쳐 분산, 공유 그리고 순환된다. 소통과 협력은 복잡성 이론의 핵심요소들이다. 창발성은 자기-조직의 파트너이다. 체계들은 자기-조직을 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기-조직은 선험적인 위대한 계획이나―우주론적 주장―목적론적 주장에도 따르지도 않는다. 복잡성도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자기-조직은 창발하며, 그것은 내적으로 생성이 된다. 그것은 외적 통제에 대한 반정립이다. 질서는 자유롭게 찾아오며 그리고 통제를 대체한다. 자기-조직화된 질서는 유기체와 그것의 환경 사이에서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스스로 창발하며, 그리고 초기 조건들의 지식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구조들이 창발한다. 그러한 창발된 체계는, 그 자체로, 복잡성이며 그리고 그 체계를 생성시킨 그러한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상들은 자신들의 창발성의 수준들에서, 즉 자신들의 보다 더 낮은 수준의 행위들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새로운―창발된―수준에서 연구되어져야 한다. 변화하는 환경들 안에서 생존을 위한 복잡성, 변화 그리고 적응성 등의 확대를 향한 운동은 곧 ‘자기-조직화의 임계성’을 향한 운동이기도 하며, 그 안에서 체계들은, 자기-조직을 통해서, ‘혼동의 가장자리’를 향하여 진화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모래더미를 생각해보자. 만약에 한 번에 한 개씩 모래알을 떨어뜨린다면 피라미드 형태의 모래더미가 나타난다. 계속해서 모래알을 떨어뜨려보라 그러면 작은 모래알의 흐름이 모래더미를 내려오게 된다. 더 계속해서 모래알을 떨어뜨려보라 그러면 그 모래더미는 다시 약간 다른 형태로 쌓아지게 된다. 더 계속해서 모래알을 떨어뜨려보라 그러면 전체 피라미드 형태로 쌓인 모래더미가 카드로 쌓은 집처럼 무너져 내리게 된다. 이것이 혼돈이며, 그리고 복잡성은 혼돈의 가장자리에 머물고 있으며, 모래더미가 무너지기 직전의 지점이며, 기계적인 예측 가능성과 완벽한 예측 불가능성 사이의 지점이기도 하다. 하나의 체계는 오로지 다양성과 이탈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자발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 운동, 재구성 그리고 이어지는 모래더미의 붕괴 등은 대체로 예측 불가능하다. ‘자기-조직화의 임계성’의 지점에서, 모래더미가 기울어지는 지점, 하나의 사건의 결과들은 매우 중대한 경향들이 있으며, 나아가 작은 원인들은 작은 결과들만을 산출한다는 뉴턴식 추론의 선형성을 깨버린다. 단 하나의 모래알의 추가가 총체적으로 모래더미의 붕괴를 야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변화란 자기-조직화의 임계성을 향한 운동이며, 그리고 그러한 자기-조직화의 임계성은 ‘어떠한 외부 인자로부터의 간섭 없이’ 진화하는 것이다. 질서는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통제와 다른 것이다. 만약에 모래알들이 서로 관계를 맺지 않고 서로를 함께 지탱해주지 않는다면 모래더미는 아무 의미도 없다, 즉 접속과 상호 지지가 필수적이다. 혼돈의 가장자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개체들과 체계들의 행태들, 관념들 그리고 실천들이 더욱 더 창조적, 개방적, 상상적, 다양한 그리고 풍요로운, 참여자들 사이에서 접속, 네트워킹 그리고 정보공유(흐름의 내용과 비율) 등이 더욱 더 확대되어진다. ‘복잡성 적응 체계들’은 외부 환경을 검색하고 그리고 감지해내며 그리고 나서 변화하는 외부 환경의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부적 조정들과 개선들을 이루어낸다. 이것이 ‘필수적인 다양성의 법칙’이며, 이는 내부적 체계들, 유연성, 변화 그리고 역량 등이 반드시 외부적 환경만큼 강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폐쇄적 체계들은, Prigogine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듯이, 만약에 그들이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한다면 기능이 정지되고 쇠약해져 엔트로피(열적 죽음)로 빠져든다. 변화하든지 혹은 죽든지. 복잡성 이론과 교육 학교들은 복잡성 적응 체계들의 많은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으며, 따라서 예측 불가능하고 그리고 변화하는 외부적 환경들 안에서 작동하는 역동적, 예측 불허의, 비선형적인 조직들이다. 참으로 학교들은 거시적 그리고 미시적인 사회적 변화를 형성하고 동시에 거기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공동체들과 사회를 조직하고, 반응하고, 그리고 만들어간다(즉, 모든 집단들은 공진화한다). 복잡성 이론은, 관계들을 통한 변화, 발달 그리고 진화에 대한 이론으로서, 교육 철학을 위한 흥미로운 아젠다(의제)를 제기한다. 변화는 곧 학습이다; 학습은 복잡성 이론과 교육 모두에 있어서 중심적인 요소이다. 모든 복잡성 현상들과 체계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학습, 적응 그리고 변화해야 한다. 여기서는 학습과 교육적 연구는 교육에 대한 복잡성 이론의 가능성 있는 영향의 두 가지 사례로서 간주된다. 교육적 연구는 발견에 관심을 두고 있고, 이는 내부와 외부적 환경들에 관한 학습과 지성을 위한 복잡성 이론의 필요성을 증식시키는 필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복잡성 이론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교육 철학을 위해서 다음의 내용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발성과 자기-조직; 접속: 통제 없는 질서; 다양성과 잉여성; 예측불가능성과 비선형성; 공진화; 소통과 되먹임; 개방적인, 복잡성 적응 체계들; 그리고 통제의 분산? 그 뒤에 이어지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미래 속에서, 복잡성의 본질은 해답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목표들 및 가치들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복잡성의 요소들은 교육과 학교 안에서 반드시 구현되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에 그러하다면, 어떻게? 불확실성, 변화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의 풍토 안에서 학교의 목표들과 가치들은 무엇이 되어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바꾸어야하는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학교 안에서 누구의 목표들과 가치들이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학교는 자신의 목표들과 가치들을 결정하는 방식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학교는 어떤 그리고 누구의 정체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학교의 위치설정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항상적인 불안정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이론과 가치의 다원주의가 학교와 교육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복잡성 교육 체계들과 실천들 안에서 ‘진보’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통제보다는 오히려 질서를 어떻게 규정하고 가치를 둘 것인가? 교육과정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불확실성의 풍토 안에서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식의 무정부주의적 이론(가령 복잡성 이론에 토대를 둔 것과 같은)은 학교에서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가? 불확실하며, 그물망 구조에 근거한, 무한히 상호 연결되어 있는 세계 안에서 논리적 관계들(예를 들어, 내포, 배제)은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학습자들은 누구인가? 미리 설정된 환경 안에서(예를 들어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다양성, 자율성, 창조성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 등이 어떻게 번창할 수 있겠으며 그리고 해야 하는가? 미리 중앙 집중적으로 설정된 교육과정 안에서 자유, 다양성, 자율성과 선택이 어떻게 실행되어질 수 있겠는가? 교육에 있어서 통제의 부과로부터 창발적인 질서로 이동하는데 있어서 위험성들과 이득들은 무엇인가? 교육에서 위험 부담은 어떻게 촉진될 수 있고 그리고 어떻게 촉발되어야 하는가? 프로그램화된 계열의 학습보다는 오히려 그물망의 학습 구조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압도적으로 개인의 수행능력에 대한 평가가 상호작용능력, 접속능력 그리고 집단적인 지식 등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으며 그리고 해야 하는가? 교육에서 어떤 종류의 되먹임이 창발성, 자기-조직과 접속을 촉진시키는가? 우리는 되먹임의 결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에서 개방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잡성의 상태, 창발성 그리고 자기-조직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만약에 예측 불가능성, 변화 그리고 다양성이 지배적인 추세라면 교육에서 ‘작동하는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관념들,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론 사이의 차이들은 무엇인가? 만약에 결과들이 원칙적으로 불확실하다면 다른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판단될 방법론들, 교육과정들, 교육론들, 평가체제들의 기준은 무엇인가? 복잡성의 정의에 의하면, 비록 측정이 가능하다하더라도, 그 측정들이 우리들의 이해에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일 때, 왜 수행능력을 측정하려고 하는가? 접속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교육적 환경은 어떻게 개인들과 집단들을 형성하고 동시에 그들에 의해서 형성되는가? 외부적으로 규제되는 교육의 풍토 안에서 창발성과 자기-조직은 어떻게 증식되는가? 무엇을 가르치고 그리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교육에서 체제 통합을 위한 순응과 창발적인 변화를 위한 다양성의 필수적인 임계치 등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가? 학교들은 외부 세계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가? 학교들은 변화를 위한 외부의 압력에 굴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 그러하다면, 어떤 압력에,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불확실성과 비선형성의 풍토 안에서 ‘기준들’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 실천 속에서 접속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접속 하지만 다양성은 어떻게 동시 발생적으로 개발되어야 하는가? 복잡성 적응 체계로서 학교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개발되어야 하는가? 접속의, 공유된 그리고 집단적인 정신이 무엇인가? 교육론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교육에서 협동과 경쟁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복잡성 이론에서는 생존이 두 가지 모두를 요구한다)? 상호작용을 위해 충분한 공통성을 구축하는 동시에 어떻게 다양성이 증폭될 수 있겠는가? 창발성과 자기-조직이 교육 안에서 그리고 상호작용을 통해서 어떻게 촉진될 수 있고 동시에 해야 하는가? 어떤 종류의 창발적 형태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들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교육의 전반적으로 압력솥과 같은 체계들 안에서 잉여성과 시행착오 등이 어느 정도까지 용인해야 하고 그리고 용납되어야 하는가? 교사들은 불확실성을 위해서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자율성, 창조성, 그리고 협동과 협력학습 등은 학습자들 안에서 어떻게 촉진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그물망 구조들의 경계선들이 분명하지 않다면, 이들 모두의 용인 가능한 한계는 무엇인가? 학습자들로서의 교사들과 도우미들로서의 교사들 내에서 전문지식의 본질과 위상은 무엇인가? 교실 안에서 어떻게 통제 없는 질서가 고무되어질 수 있는가? 질 높은 교육적 성과들을 확보하고 낮은 수준의 탐욕에 의해 추동되는 교육과정을 피해가면서, 동시에 어떻게 비선형성이 촉발되고 인지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교사들(자신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는)은 진리를 위한 협력적인 탐구에서, 지배적인 위치보다는 오히려, 평등한 동반자로서 참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학습에서 ‘구조’가 비선형 체계 안에서 이론화되어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효용체가’가 학습에서 극대화되어질 수 있겠는가? 물론, 대부분의 이들 질문들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교육에 대한 통제의 증가, 과중하게 미리 설정된 강제적인 교육과정의 내용, 예측 가능한 목표를 기준으로 한 개인들의 수행능력에 대한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평가의 강화와 항상적인 점검 등의 풍토 안에서 잠자고 있었던 그러한 주제들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를 복잡성 이론이 제공해 주는 것이다. 복잡성 이론은 교육의 ‘기본’을 재정의하고, 통제받고 그리고 통제하는 훈육에 바탕을 교육에서부터 벗어나서 탐구적, 간학문적, 창발적인 교육과정과 교육의 필수조건으로서 자유에 대한 재확인을 지향한다. 복잡성 이론은 학습과 교육의 목표들, 내용, 교육론, 그리고 평가를 위해 깔끔하게 진술된, 중층적으로 규정된, 단정한, 전통적인, 외부적으로 강제되고 규제되는 정부들의 교육정책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추가해서 말하자면, 복잡성 이론은 상향식 발달과 변화, 제도적인 국지적 의사결정, 아동 중심에 대한 재확신 그리고 체험, 탐구학습, 강력한 규제와 교수법 및 학습에 대한 선형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 등을 지향하는 운동이며, 그리고 비선형적 학습, 무정부주의적인 인식론들 그리고 그들의 교육과정 상관관계들을 추구하는 노력을 주장한다. 복잡성 이론은 학습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과정을 중시하는데, 그 이유는 지속적인 관련성을 갖는 교육과정의 구성요소들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여러 영역들 사이의 접속들은 서로 투과가 가능하며, 유동적이며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학문들 간 경계선들은 해체가 된다; 교육과정은 획일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차이화되어지고 그리고 차이가 난다. 복잡성 이론의 윤리적, 인식론적 그리고 존재론적 함축성들은, 다른 말로 바꾸자면, 교육 철학의 핵심 영역들이다. 불확실성의 풍토 안에서 학교가 어떤 가치들을 고수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동일한 풍토가 학교들로 하여금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정체성, 가치들과 자기창조를 요구한다. 어떻게 학교들은 이러한 상황―항상적인 변화와 자신들의 가치를 확고하게 고수해야 하는 진퇴양난―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고착성과 확고 부동성을 금지하면서도 동시에 확고부동하게 그러한 금지들을 고수해야 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딜레마의 반향이기도 하다. 혁신학교 : 학습과 교수법 복잡성 이론 안에서, 학습은 창발성의 과정이자 개인, 사회집단 그리고 보다 더 넓은 사회의 공진화이다. 구성 요소들 자신보다는 오히려, 구성 요소들 간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은 복잡성 적응 체계로 간주된다. 이러한 주장은 학습의 ‘텅 빈 그릇’ 이론을 반대하는 것이다. 오히려, 지식은 창발적이고 그리고 정신은 창발적이면서 동시에 발달적이다. 우리들의 정신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신이 각각의 새로운 사건들에 부딪히고 그리고 학습한다. 그것은 방금 전의 정신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정신은 공통의, 집단적인 그리고 분산된 특성이다. 전체는 부분들의 단순 총합을 초월하며 그리고 통제권을 지닌 유일한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벌떼는 단 한 마리 벌의 수천 번에 걸친 행위들의 합 이상이다. 지식은 공통의 문화적 자산이다. 어떤 개인도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지 않는다. 개인들은 오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지식은 공동체들 내부에 존재한다. 집단적인 의식을 지닌 집단적인 정신으로 인간의 정신을 재정의하는 것은, 예를 들어, 여기에서의 정의에 의해, 지식이 집단적인 것일 때 어떻게 개인은 ‘인식’하게 되는가? 처럼, 교육에 있어서 인식론, 교육과정 계획 그리고 평가 등에 대해 의미심장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정신은 생물학적인 뇌의 복합물이자 그리고 각자가 지속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동시에 적응하는 문화적 그리고 상징적인 환경이다. 개인들과 자신들의 환경들(어떻게 정의되든, 인지적, 문화적, 공동체적, 사회적, 정서적, 물리적이든)은 서로의 인자들을 창발적으로 형성해낸다. 지식은 동시 발생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국지적으로 맥락적인 상황 속에서 학습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복잡성에 근거한 교육과정은 역동적, 창발적, 풍요로운, 관계적, 자체촉매 활동적, 자기-조직적, 개방적, 참여자들에 의해 실존적으로 반복적인 접속으로 실현되며, 교사는 전문가와 전달자로서의 역할에서 이탈하여 도우미, 공동-학습자 그리고 의미의 공동-구성자를 지향하며, 학습자들로 하여금 현재의 지식에 새로운 지식의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학습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율성, 책임, 소유의식, 자체-방향설정 그리고 성찰을 기꺼이 실행해야 한다. 복잡성 이론은 다른 이들 그리고 개인적 인격의 인지적 및 감응적 측면들과의 접속들을 강조한다. 교육과정과 학습은 냉철한 성찰과 열정과 인간성을 함께 묶어준다. 학습에 대한 이러한 견해의 자연적 결과는, 동기부여, 즐거움, 열정, 협동과 협력적 행위를 포함하여, 창발성을 자극하는 조건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식은 현재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동화와 조절을 통해서 영원히 구성과 재구성을 반복하게 되며(정신과 뇌는 복잡성 적응 체계들), 그로 인해서 유한하게 고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와 새로운 지식 모두를 변화시킨다. 학습은 뇌를 변화시키고, 그리고 어린 아이의 뇌는 유연한 것이다. 어린 아이의 뇌는 학습하기 위해서 환경으로부터 정보를―미리 앞을 내다보면서―의도적으로 탐색하는 것이다. 귀에서부터 뇌로 가는 것보다 뇌에서부터 귀로 가는 뉴런들의 접속들이 더 많이 존재하며, 그리고 시각적 신경계 섬유질의 10% 정도는 ‘잘못된 경로’로 빠진다는 것이다. 감각 기관들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정보를 낚시질하듯 잡아챈다’. 학습은 능동적인 탐색이다. 지식, 학습자들 그리고 교사들의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핵심이며, 교사들은 도우미들이자 공동학습자들이며 그리고 학습은 공진화의 과정에서 학습자와 교사 모두를 변화시킨다. 학습은 역동적, 능동적, 체험과 참여적, 개방적, 예측 불가능 그리고 불확실하며, 그리고 인지는 상호작용, 탈중심적인 통제, 다양성과 잉여성을 요구한다. 벌집 안에는 수많은 개체들이 존재하며, 작은 실패들은 대중 속에서 사라진다. 시행착오를 통한 창조성과 새로움은 잉여성과 임계치를 통해서 전개될 수 있다. 창발성과 자기-조직은 발달을 위한 공간적 여지를 요구한다. 교수법과 학습에 있어서 완벽하게 미리 설정되어 프로그램화되고 통제된 교육과정들과 형식들, 그리고 표준적인 비율의 진행은 복잡성 이론에게는 저주와도 같다. 복잡성 이론은 엄격한 교육과정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다. 토론에 근거한 연구는 여기서는 중요한데, 그 이유는 투과 가능한 주체의 경계선들의 희미한 분류와 구성을 구현하는 자율적인, 체험적 그리고 유연한 학습이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동시에 자유로워진 사유. 타협을 다루는 학습과 교육과정 내용에 대한 고차원적, 실존적, 질문적, 평가적 접근방법들은 매우 중요하며, 문제-해결의 행위들과 승인된 지식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는 옹호를 받으며, 교사들은 변화를 추구하는 도우미들로서 역할을 한다(복잡성 이론은 결국 생존을 위한 변혁의 이론이다). 내부적으로 그리고 외부적으로 접속된 뇌 안에서의 학습은 창조성, 정서 그리고 인지를 통일시킨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냉철한 인지와 고등 인식기능들 속으로 고정되어 있다. 의미, 가치 그리고 느낌들은 냉철한 논리와 차분하고 초연한 합리성의 절제된 미보다 우선한다. 현실적인 정신들은 가능한 세계들의 전조이며, 그리고 가치들, 자극들, 주장들 그리고 전망들에 관하여 가능한 세계로부터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잡성 이론에서는, 학습은, 주어진 지식의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공동의 탐험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학습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학습자들과 교사들 사이의 풍부하고도 실제적인 되먹임이 필수적이다. 인지는 곧 대화이며 그리고 높은 수준의 구두적인 상호작용은 필수이다. 교사가 핵심이며, 자기-조직을 통한 학습과 아동의 창발적인 지식을 위한 조건들의 발판을 마련하고 창조하기 위해서 신중하게 개입해야 한다. 인지는 단순히 새로운 지식의 획득이 아니다: 인지는 동기 부여, 인격들, 학습 형태들, 성향들 그리고 선호들, 총체적인 인간성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가르침과 학습이 개인과 사회의 상호교차 지점에서 발생하며 그리고 그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이것은 확실성, 통제, 예측 가능성 그리고 편협한 학생 성적에 대한 책임을 추구하는 관리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힘든 모델이다. 학습은 동반자들과 인자들(관계들과 접속들을 통한 공진화) 사이의 매 순간의 창발적으로 구성되는 춤이다; 동반자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춤을 창조해내고,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한다. 모든 참여자들이 공진화하는, 공동의 적응과 유연한 실천의 공동체들로서 함께 어울린다. 학습의 그물망은 은유적인 위상을 초월하여 실제적인 것으로 생성한다. 학습은 다양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으며, 실증주의와 행동주의의 단순한 선형성을 부수어버린다. 학습의 그물망은 자신만의 생태학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각각의 학습자는 동시 발생적으로 학습의 여러 가지 그물망들(공동체들)에 거주한다. 생태학적 정당성은 공동체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결정되고 가치가 매겨지는 학습으로서 추가적인 의미를 띄게 된다. 참으로, 교사들은 ‘생태-기술자들’이 되어야 하며, 학습자들이 거주하는 학습의 그물망들, 각각의 적합한 풍경들, 전일적으로 그들을 촉진시키는 방법 그리고 학습의 그물망의 애매모호하면서도 무한히 희미해지는 경계선들을 이해하고 작업하는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학습과 지식은 이미 존재하는, 외부 세계에 거주하는 실재론자인 학습자와 더불어,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성주의자인 학습자는 진화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재생산해낸다. 학생들과 교사들이 함께 자신들과 서로의 의미들을 창조하고, 공유하고 만들어낸다. 자아는 상호접속과 상호관계 체계의 네트워크 구성물이며, 인간성은 그가 거주하는 그물망들의 요소들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부터 창발한다. 개인, 집단, 계급, 학교, 공동체들은 모두 상호 관련되어 있고 그리고 서로에게 감응을 준다. 그들은 격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리고 독립적이지도 않다. 교육론은 전달이나 전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공장 조립라인을 위한―‘가능성’, 개방성, 자유, 자율성 그리고 모험정신의 언어와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적으로 전체주의적이며, 통제와 폐쇄적인 것이고, 그래서 복잡성 이론은 폐쇄, 통제, 순응과 통일성을 금지시킨다. 복잡성에 기반한 교육론은 소통을 요구한다. 그것은 Habermas의 소통 행위와 이상적인 발화상황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여기에는 특히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 논의에의 참여, 의문시되는 주장들에 대한 점검, 설명들과 정당화들을 평가하는 자유;  주어진 개념적 틀을 조정하고 그리고 규범들을 변경하는 자유;  참여자들 사이의 상호 이해  진리, 정당성, 진정성 그리고 이해의 타당성 주장들을 준수하며, 그리고 자율적이고 평등한 동반자로서 대화에 참여하는 각각의 주체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대화를 위한 평등한 기회  토론을 위한 평등한 기회, 그리고 참여자들의 위상에 따른 권력으로부터가 아니라, 오로지 보다 더 적합한 주장의 힘으로부터 도출되는 토론으로부터 산출되는 타협적인 합의의 산출  진리를 위한 협력적인 모색을 제외한 모든 동기의 배제 Habermas의 ‘보다 더 적합한 주장의 강요되지 않은 힘’, 대화 그리로 토론은 교수와 학습에 있어서 진리를 위한 이러한 복잡성의 공동탐구의 일부이다. 물론, 하버마스의 연계성을 지나치게 너무 멀리 압박할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복잡성 이론이 소통 행위보다는 전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혁신학교 : 교육 분야 연구 학습은 연구 작업을 함축한다. 교육 분야 연구에서는, 복잡성 이론이 교육에 있어서 실험적 그리고 실증주의적 연구의 가치에 도전한다. 복잡성 이론은 선형적, 결정론적, 예측 가능한, 실증주의적, 보편적, 안정적인, 원자화된, 객관적인, 기계적인, 통제되는, 측정 가능한, 폐쇄적 체계의 법칙에 따른 행태와 단순한 인과성에 반대한다. 복잡성 이론은 이들을 네트워크들, 연쇄적 관계들, 전일주의, 되먹임, 관계들 그리고 맥락 안에서의 상호작용들, 창발성, 역동적 체계들, 자기-조직과 개방적 체계들(폐쇄적인 실험 세계들보다는 오히려)로 대체한다. 심지어 우리가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매 순간 창발적인, 상호작용의, 관계적, 개방적인 상황들에 대한 실험의 응용은 제한적이다. 역동적으로 진화하는 유동적인 개방적 상황 안에서 변수들을 항상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측정되어지는 것은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복잡성 이론은 연구의 ‘황금 기준’인 무작위적인 통제되는 실험에 이의를 제기한다. 복제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을 위한 요구에 따르는, 고전적인 실험적 방법들은 특히 유용하지가 않는데, 그 이유는 복잡성 현상에서는 결과들이 결코 분명하게 복제 가능하거나 혹은 예측 가능하지 않다. 헤라클리투스(Heraclitus)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는 결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목욕할 수가 없다. 복잡성 이론은 교육적 연구가 다음과 같은 내용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a) 다가성(多價性)과 비선형성이 교육에 적용되는 방식; (b) 주의주의(主意主義)와 결정론, 지향성, 인자와 구조, 생활세계, 그리고 체계, 발산과 수렴이 학습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방식; (c) 교육의 과정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간단한 인과성을 이용하고 동시에 초월하는 방식; 그리고 (d)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요소들 자체의 생태학을 가진 것으로, 전일적으로 체계를 보는 것이 원자적 접근보다 더 강력한 방식. 현상들을 측정 가능한 변수들로 원자화시키고 그리고 오로지 이들 중 일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전체의 동반 상승효과들과 의미를 놓치는 것이다. 아무리 정밀하다 하더라도, 측정은 현상에 관해 우리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별로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한 사람의 모든 관찰 가능한 변수를 무한소의 정도까지 측정할 수 있지만, 그의 본성은, 그 혹은 그의 본질을 만들어 주는 것, 원자화와 측정을 빠져 나간다. 비트겐슈타인(1961, p. 56)에 따르면, 우리들 의식의 한계가 우리들 세계의 한계들을 나타낸다. 우리는 복잡성을 설명 혹은 이해하려고 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가진 현재적 의식의 포로들일 수 있다. 우리는 복잡성을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전일적인 도구들과 의식이 필요하다. 교육적 연구에서의 전통적인 분석의 단위들(예를 들면, 개인들, 제도들, 공동체들과 체계들)은 반드시, 분석의 단위가 특정한 주제 혹은 이해관계의 중심(‘이상한 끌개’)에 초점을 맞춘,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그물망이나 혹은 생태계가 되도록, 서로가 합쳐져야 함을 복잡성 이론은 제안한다. 개인들, 가족들, 학생들, 학급들, 학교들, 공동체들 그리고 사회들은 공생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들의 관계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며 그리고 종합적인 것이 아니라 분석적인 것임을 복잡성 이론은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복잡성 이론은 사회적, 개인적, 그리고 제도적 변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것은 거시와 미시-연구 사이의 관계를 제공한다. 전일주의를 다루는데 있어서, 복잡성 이론은 질적 그리고 해석적 설명의 상호작용주의에 전제한, 사례 연구 방법론, 질적 연구 그리고 참여적, 복합적-관점의 그리고 협력적(자기-조직의), 동반자 의식에 근거한 형태의 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이질성이 복잡성 이론의 주요 슬로건이다. 복잡성 이론은 실제적인 의제와 동시에 일련의 방법론들을 제안하는 것이며, 나아가 방법론적, 패러다임적 그리고 이론적인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결론 복잡성 이론은 일단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면 우리는 도처에서 복잡성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복잡성 이론은, 전통적인 인식론, 인지, 단순하고 환원론적인 확실성들, 선형적 인과성에 대한 도전들과 더불어, 자율성과 창조성에 대한 옹호와 결합하여, 교육철학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들을 제기한다. 진정한 과학으로서, 그것은 항상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할 것을 소리쳐 외친다. 그것은 낡고 익숙한 것을 재활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창발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항구적인 새로움, 불균형과 개방적 체계의 이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비록 그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함에 있어서 겸손과 인간성을 위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정신들이 우리의 한계이다. 우리 자신의 오류 가능성의 실현에 대한 인식론적 그리고 존재론적 충격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다. 인간성이 기술 지배를 대체한다. 이들은 복잡성 이론과 교육철학 모두를 위한 환영할만한 용기 있는 원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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